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기 전, 괜히 현관 앞에서 멈칫했다. 몸을 돌려서 천천히 돌아본 방은 지난 12년 동안 달라진 부분이 거의 없었다. 몇 년 전 중고로 바꾼 냉장고의 시원찮은 소음만 들어찬 공허한 공간에는 이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거의 지워진 참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가방 안에는 이곳에서 지내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이 장...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은 탓인지 오늘은 유독 무릎이 시렸다. 뼛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은 지독하도록 사실적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 몸은 조금의 생채기조차 얻지 못한 비겁자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무슨 언질이라도 들었는지, 혹은 단전이 없는 몸을 단순히 얕잡아 본 탓인지 놈들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온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지난 몇 ...
Crossword 드물게도 이명헌은 지금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운전 중인 매니저 김낙수는 몇 번이나 룸미러로 이명헌의 안색을 확인했다. 평소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액정을 두드리는 이명헌이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김낙수는 교차로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냥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이명헌은 시선...
평소처럼 하교하던 도중, 시내로 통하는 으슥한 골목길 근처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익숙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멋대로 체육관에 드나들면서 몇 번쯤 마주친 얼굴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양호열은 도로 건너편에서 발견한 말간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 키보다 훨씬 큰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버릇처럼 약간 곤란한 낯을...
10: [時節戀人] 부민관과 조선극장에서 큰 폭발에 있었던 일은 이제 계절이 끝나감에 따라 모두에게서 점차 잊혔다. 전쟁 준비는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있었고, 동양극장에서는 지난번 미수에 그쳤던 아시아 해방 강연회와 웅변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혼마치 근처를 지날 때면, 일렁이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동요가 짙었다. 사람들의 걸음 역시 빨라졌고...
9: 無復餘望 이달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명헌은 이달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본래 오늘은 레코드판을 사러 갈 예정이었다. 축음기를 틀어 놓고 지내는 동안, 이달재가 가져왔던 상자 안의 레코드를 전부 틀어 봤으니까. 이명헌이 버릇처럼 ‘타향살이’를 손에 들었을 때, 같이 레코드판을 사러 가지 않겠냐고 먼저 물었던 건 이달재였다...
8: 불확정성 한때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보다는 더 나아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다. 심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더 나은 무언가로 변하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긴 세월을 아등바등했다. 처음엔 책을 모아서 늘어놓고 몇 날 며칠씩 읽었다.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을 발견할 때는 그냥 통째로 외우며 밤을 새웠다. 억...
7: 완성선 그날 이후 이달재는 열흘이 지나도록 사진관을 찾지 않았다. 근본 없는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이명헌은 이달재의 모포를 만지작거리며 시름을 달랬다. 보고 싶은데 보질 못하니, 들숨과 날숨이 드나드는 순서마저 의미가 없다. 이런 식으로 서로 멀어져 버리면 쉬이 찾을 수 없겠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이 어찌나 독한지, 속이 들끓었다....
6: 안녕이 머무는 자리 벌써 경성에 발을 붙인 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른다면 앞으로 이십 년 후는 얼마나 빨리 닥쳐오려나. 이명헌은 이달재의 머리칼이 잿빛으로 물드는 날을 상상하며 쓴웃음을 삼켰다. 아마 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모양을 지켜볼 수는 없으리라. 앞으로 이십 년이 흐르고 나면, 존재하지도 않는 친지를 핑계...
5: 봄바람은 불고 이달재는 따로 약속을 정하지 않은 채로도 종종 사진관에 찾아왔다. 방문 시간은 대중이 없었다. 이달재는 아침 일찍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가거나,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 되어서야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아침이나 낮에 찾아오는 건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드는 게 즐거웠으니까. 그런데 늦은 밤이나 새벽에...
4: 유일[流溢] 시간이 날 때 들르라고는 했는데, 이달재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눈앞에 나타난 이달재를 내려다보던 이명헌은 얼떨떨한 기분은 애써 감추기 위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명헌이 당황과 대비될 정도로, 이달재는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서 웃고 있었다. 마치 지금 딱 시간이 맞아 이곳에 왔노라고 말하는 ...
3: 영원을 걷는 자 전장의 공기는 싸늘했다. 얇은 옷을 겹겹이 걸쳐 입어도 막을 수 없는 추위에 모두가 벌벌 떨었다. 날숨을 뱉을 때마다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은 제법 기꺼웠다. 이 정도의 추위라면 잔뜩 굳은 얼굴로 사시나무처럼 떨어대도 누가 겁쟁이라고 욕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얗게 버짐이 핀 얼굴을 쓱쓱 닦아낸 이명헌은 희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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