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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반도

1. 화호난화골(畫虎難畫骨)


1. 화호난화골(畫虎難畫骨)

     


아.

소화는 짓밟힌 발을 얼른 당겼다.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시녀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소화는 안간힘을 써서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이번에는 좀 다를까 싶어서 우르르 몰려오는 시녀들의 앞을 가로막아 보았지만, 역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두 소화를 보지도 않고 밀치며 지나가다가 발을 밟고 어깨와 머리를 때린다. 휘청거리다가 넘어지면 그대로 밟혀 죽을 테다. 소름이 돋았다. 아마 밟혀 죽는데도 아무도 소화가 죽은 줄도 모르겠지. 갑자기 아뜩해지는 고통이 엄습하고, 누군가의 발에 걷어차인 소화가 휘청거렸다.

바닥이 가까워지니 소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작은 몸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고, 누군가 소화의 다리를 밟고 넘어졌다. 우당탕 소리가 나며 주변의 시녀들이 높은 목소리로 “어머, 어머!”하고 누군가를 걱정하는 난리를 틈타, 소화는 얼른 몸을 일으켜 절뚝이는 다리로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저녁놀이 하늘을 붉게 태우는 와중에, 거처로 돌아가던 시녀들이 바닥에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얘, 무릎은 괜찮니?

다리 좀 봐, 접질린 거 아니니?

어쩌면 좋아 피 나네, 빨리 들어가자. 내가 들어가서 약을 발라줄게.

다정한 목소리들이 양지에서 휘몰아치는 사이에 소화는 작은 벌레처럼 그늘에서 몸을 말고 앉아 있었다. 소화는 그 모습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벌겋게 살갗이 드러난 자신의 무릎이나 팔꿈치 따위를 들춰보며 생각했다. 

그까짓 게 뭐 그리 아프다고. 

소화는 상처 가득한 팔과 다리를 쓸어내듯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엎어졌던 시녀의 뽀얀 볼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나머지 시녀들 모두가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금덩어리도 아니고 진주알도 아닌 짜디짠 물 몇 방울. 

그깟 눈물 좀 흘린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소화가 소리 내어 중얼거렸으나, 아무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넘어진 시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토닥이기 바빴다. 소화는 그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움츠렸다. 괜히 추웠고, 괜히 기분이 울적했다. 아니, 사실은 이것이 괜히 차오르는 울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안다.

이것은 샘이다. 이것은 시기이고, 이것은 서러움이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흙먼지 가득한 손이 얼굴을 꾹꾹 내리눌렀다. 못난 감정이 안으로 스며들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소화 혼자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다. 

소화는 그늘에 앉아 양지의 밝은 시녀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같은 것을 먹는데도, 소화는 그늘에 있고 그들은 양지에 있다. 어쩌면, 소화는 자신이 그늘 그 자체가 아닌가 생각했다.

소화는 벌써 백스물한 살 된 여우였다. 영력을 쌓아 영수의 여우 가죽을 숨기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게 된 지 어언 백 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어린 나이였다. 꼭 쥔 주먹이 아직도 작고, 발가락이 다섯 개씩 붙어 있는 발도 조그마했다. 

소화는 제 자그마한 손에 묻어난 붉은 핏물을 아무렇게나 치마에 대고 닦아냈다. 저 앞에서 절뚝이는 시녀를 두 명이 부축해 들고서 숙소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높이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리 사라지자 소화도 그늘에 움츠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좀처럼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에 맺혀있던 피가 발목까지 주르륵 미끄러진 자리가 화끈거렸다. 소화는 억지로 걸음을 떼어보려 했지만, 걸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넓고 아름다운 대라천 한가운데, 홀로 남은 작은 여우는 마치 산 것이 아닌 듯 한참이나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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